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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클팍 박영주 x 앙티수 남성숙 선교사의 피지선교 이야기 The mission stories of Uncle Park and Aunty Su in the South Pacific Islands

연재22 [광야의 만나]

  • 2021.04.02 06:29
  • 박영주의 글

박영주의 「모세와 함께 시간여행」 책과

           짝을 이루는 묵상 노트

 

제22과

 

제목: 금송아지 (출24:12-18, 32:1-29)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모세는 여호와의 부르심을 받아 산에 올라 40일을 머물었고 십계명 두 돌판을 받았다. 산에서 내려와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광란의 춤판을 벌이는 현장을 목격하고 십계명 돌판을 던져 깨뜨렸다. 레위인들이 무작위로 백성들을 죽였고, 멸망의 위기에서 백성은 모세의 중보기도로 구원함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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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찰 질문

 

1. 백성들이 송아지 형상의 신을 만들고 종교 제 의식을 행한 동기는 무엇일까? 또, 왜 송아지 형상을 택했을까?

 

2. 모세가 십계명 돌판을 깨뜨린 것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또, 그것이 부서졌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 백성들에게 금송아지를 부순 가루를 물에 타서 백성들에게 마시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4. 피의 맹세를 지키지 못한 백성들이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5. ‘금송아지 신앙’의 현대적인 의미는 무엇일까?

 

☞ 본문 해석 노트

 

1. 하나님을 묵상하고 그와 교제하는 것이 행복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부름을 받고 산에 올랐다. 함께한 여호수아는 산기슭에 남겨 두었다. 모세는 그를 불러주신 주님 은혜가 감사했고 기도로 그와 교제하는 시간이 좋았을 것이다. 산 위에서 사십일 동안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 원리인 법에 관하여 묵상하며 그의 뜻과 마음을 아는 것이 기뻤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하는 행복으로 감사가 넘쳤을 것이다.

 

2. 인간의 조급함은 불신을 낳고 우상숭배로 이어진다.

 

하나님이 직접 새겨주신 십계명 돌판을 들고 산에서 내려왔을 때 모세는 백성들이 능력과 번영을 상징하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신이라 부르며 춤판을 벌이는 광경을 목격했다.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그들은 불안과 두려움으로 신상을 만들어 이집트에서 본 종교 제의식을 모방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풍습을 좇아 신을 섬겼고 그것이 신을 만족시킬 줄 알았다. 무지한 그 신앙은 자기중심적이며 자기만족을 위한 광대놀음에 불과했다.

현실의 불안과 염려는 우리의 믿음을 드러나게 한다. 미래의 불안으로 사람들은 돈, 성공, 편안함, 화려함을 추구하며 그것을 우상화한다. 우상화 신앙으로 제사가 형식화되어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었다. 중세 교회의 부패는 교회를 죽음에 이르게 했고 종교개혁으로 허물을 벗었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인격과 영으로 신을 섬겨야 한다. 신 앞에 인간적 조급함은 신앙적 불신이다. 사울 왕도 사무엘이 올 때까지 이레를 기다리지 못해 선을 넘는 죄로 버림받았다. 모세의 사십일은 우리가 범사에 기다려야 할 필요한 시간이다. 한 달일 수도 있고 일 년일 수도 있다. 모세의 40일 지체는 신약시대 주의 재림을 기다리는 시간의 모형이기도 하다.

 

3. 인간 최고의 복은 하나님 언약 안에 사는 것이다.

 

십계명 돌판을 깨뜨려버린 것은 모세의 인간적 분노가 아닌 신의 분노였다. 부서진 십계명 돌판은 백성의 죄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의 파기됨을 의미했다. 인간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그와 맺은 언약을 유지할 때 복을 누릴 수 있다. 언약의 깨어짐과 관계의 단절은 영적인 죽음이다. 단절에는 심판과 사망에 이르는 본질적인 것과 평강과 소망을 잃고 고난에 이르는 임시적인 것이 있다. 전자는 아직 하나님과 관계를 맺지 않은 죄인의 경우이고 후자는 성도가 죄를 지어 징계를 받는 경우다. 성도는 본질적으로 의義의 나무가 되었기에 넘어질지라도 완전히 엎드려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모세의 중보기도로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했듯 우리에게 중보자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중보자의 모형이었고 예수는 새 언약의 중보자다. 옛 언약은 이스라엘이 대상이지만 새 언약은 온 인류에게 열려 있다.

 

☞ 나의 노트(묵상과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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