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16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16과
제목: 사역의 전략적 전환
(마14:22-15:28, 요6:22-71)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빈 들에서 오병이어 사건이 있던 날 그 밤에 예수는 홀로 산에서 기도하다가 밤늦게 바다 위를 걸어 먼저 떠난 제자들의 배로 왔다. 이튿날 예수는 가버나움 회당에서 오병이어의 의미를 설명했다.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찾아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이후 예수는 소수 제자훈련에 집중하려고 대중을 피해 그들만을 데리고 변방으로 떠났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14-220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오병이어 사건이 있던 그 밤에 바다 위를 걸어 다가온 예수를 본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특히 베드로의 반응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
2.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는 오병이어 사건에 대하여 어떤 설명을 했는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떻게 나타났는가?
3. 예루살렘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예수가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했는데 신앙적 외식이란 무엇인가?
4. 예수가 소수 제자만 데리고 두로와 시돈, 변방으로 떠난 이유는 무엇인가?
5. 변방에서 만난 한 가나안 여인과 예수는 어떤 대화를 하였는가? 그 사건이 주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밤바다 풍랑 같은 인생의 고난은 예수를 진정한 왕으로 고백하게 한다.
오병이어 사건 직후 예수는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떠나도록 하였으며 자신은 밤늦게까지 홀로 기도했다. 십자가의 때가 가까움을 느끼며 대중 사역을 접고 소수 제자의 집중적인 훈련 사역으로 전환하는 문제를 놓고 기도한 듯하다. 한편 제자들은 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두려움에 떨며 고난을 겪고 있었다. 캄캄한 밤중에 예수가 유령처럼 바다 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돌아왔다. 제자들은 놀랐고 베드로가 대표적으로 예수처럼 바다 위를 걸었으나 파도를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는 제자들의 부족한 믿음을 책망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제자들이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환경을 뛰어넘는 굳건한 믿음을 갖기 원했다. 예수는 제자들의 고난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캄캄한 밤바다 풍랑 같은 코로나 확산의 상황도 주님께서 모르실 리 없다. 배가 뒤집힐듯한 풍랑 속에서도 배 안에서 잠을 잘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능력을 행하는 예수를 억지로 왕 삼아 인생을 쉽게 살려고 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풍랑 만난 고난 속에서 결국 진정한 왕이신 메시아 예수를 경험했다. 역경을 통해 그들은 신앙고백을 분명히 했다. “주님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입니다!”
2. 종교적 형식을 빙자한 인간 욕망의 정당화는 추한 외식일 뿐이다.
예루살렘에서 파송된 종교지도자들이 갈릴리 가버나움에 와서 예수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따라서 손 씻는 정결 예식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그들은 꼬투리를 잡아 예수 사역을 매도하려는 숨은 의도가 있었다. 예수는 그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했다. 손을 씻는 정결보다 영적 정결을 강조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보다 ‘고르반’과 같은 외식이 더 추한 죄라고 지적했다. 부모 공경의 고르반 법을 물질적 손해를 막는 방편으로 악용하는 당시 지도자들의 외식이 더 큰 죄라는 것이었다. 외식은 은밀하게 감춰둔 욕망을 종교적 형식으로 위장하는 것이다. 이는 형식이 가지는 본질적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외식하는 자들을 시각장애인으로 비유했다(마15:14). 심령 속에 감춰둔 욕망 덩어리를 보지 못한다는 의미에서다. 하나님과 소통하는 영이 죽어 있으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는 성령의 견책을 감지하지 못한다. 성령님의 개입하시는 역사에 민감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기도하자. 우리는 신앙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명분으로 일상생활에서 책임을 회피하는 현대판 고르반의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장로들의 전통과 같은 형식적 원칙이나 법규가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세우지 못하며, 우리의 영을 깨끗하게 하지 못한다. 외식은 사람을 잠깐 속일 수 있지만, 또 자신과 하나님을 속일 수 있는 듯 보이지만 하나님이 심지 아니한 것은 결국 뽑히고 만다(마15:13). 나의 말과 행동이 어디에서 왔는지 확인해보자. 인생에서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여도 하나님과 무관한 일은 바람에 흩날리는 벼 껍질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이다.
3. 구원 얻을 ‘잃은 양’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예수 공생애 세 번째 유월절 무렵 오병이어 사건이 있었던 때 예수의 대중적 인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들은 예수를 왕 삼아 배고픔을 면하고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오병이어가 그의 살과 피의 유비라고 해석하며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를 떠났다(요6:66). 그들은 진정으로 예수의 음성을 듣는 그의 양이 아니었다. 예수는 갈릴리에서 대중 사역을 접고 사역 전략을 바꾸어 소수 제자훈련 중심으로 사역을 전환하고자 했다. 그래서 대중을 피하여 변방으로 은둔 여행을 떠났다. 예수와 제자들은 두로와 시돈 지방에서 한 가나안 여인을 만났다. 귀신들린 딸을 고쳐달라고 예수를 찾아온 이방 여인이었다. 예수는 그녀의 요청에 침묵하였고 계속해서 부르짖어 간청하자 마지못한 듯 그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관심이 있다고 매몰차게 대답했다. 자녀들의 떡을 개 같은 이방인에게 줄 수 없다는 모욕적인 말까지 했다. 이는 그 자리에 함께한 제자들과 당시 유대인의 생각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제자들은 그 현장에서 예수가 이전에 전도하도록 제자들을 내보낼 때 이방인의 길로 가지 말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 가라고 했던 말(마10:6)을 기억했을 수도 있다. 그 여인은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며 포기하지 않고 예수의 자비를 구했다. 그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고 그 여인의 믿음을 크게 칭찬하였다.
이 사건은 예수의 제자훈련 과목의 하나였다. 예수는 인류 구원을 위한 십자가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은둔 여행을 통한 예수의 제자훈련은 세계선교의 방향성을 갖고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누가 진정한 이웃인가 질문했던 것처럼 예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혈통적 구분이 아니라 누가 진정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인가 깊이 생각하게 했다. 그 가나안 여인은 이방인이었지만 예수는 그녀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으로 보았다. 주님이 찾는 잃은 양은 지역과 인종을 초월하여 버림받고 소외된 존재들이다. 이방인이며 가나안 여인 같은 우리를 잃은 양으로 여겨주시고 찾아와 구원해 주신 주님께 감사 찬양을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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