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18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18과
제목: 가이사랴 빌립보 가는 길
(마16:1-12, 막8:10-26)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와 제자들은 데가볼리 지역의 대중들을 피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떠났다. 그들이 마가단(달마누다)에 도착하여 배에서 내렸을 때 기다리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예수 일행은 다시 배를 타고 북쪽 벳새다 방향으로 떠났다. 그들은 배 안에서 누룩에 관한 대화를 나눴고 배에서 내려 어떤 시각장애인을 안수하여 치료한 후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로 향했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22-225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와 제자들이 데가볼리의 대중들을 피해 배를 타고 떠나 도착한 곳은 어디인가? 그들이 배에서 내렸을 때 그들을 기다린 사람들은 누구였는가?
2.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며, 그들이 예수에게 요구한 것은 무엇인가?
3.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어떤 대답을 하였는가? 또, 기적과 표적은 어떻게 다른가?
4. 예수와 제자들은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고 은둔 여행을 계속했다. 그들이 배 안에서 나눈 대화 내용은 무엇이었는가?
5. 예수 일행이 배에서 내렸을 때 사람들이 데려온 시각장애인을 예수가 두 번 안수하여 고쳐준 사건이 암시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연합은 예수를 맞서려는 정치적 야합이었다.
신구약 중간기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강조하며 유대주의가 팽배하였다. 유대주의가 낳은 유대교는 사회적으로 네 종파로 나뉘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 종교적 규범, 원칙들을 지키고 수행하는 일을 중시했고 정치적인 문제나 체제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에 사두개파 사람들은 정치 기득권자들인 헤롯당과 밀접하게 연결되었고 현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다. 또 다른 차원의 영적 세계나 부활을 믿지 않았고 현실적 실리와 권익을 위해 종교적 명분을 이용했다. 열심당은 무장봉기를 통한 민족 해방에 관심이 많았고 에센파는 세속을 떠나 광야에서 수도원 운동 성격의 별도의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렇게 사상적 노선이 전혀 다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예수를 대적하는 일에 함께한 연합전선은 정치적 야합이었다. 복음적인 성경 주제의 흐름과 상관없는 특정 교리 문제나 정치적 이념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세력들은 예수 진리와 하나님 나라에 반反하는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이다. 주여, 교회 안에 섞여 들어와 있는 세상 나라에 속한 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소서.
2. 하나님 계시에 따른 최고의 표적은 예수 십자가와 부활이었다.
예수 일행이 데가볼리에서 마가단 지역으로 배를 타고 온다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예수가 은연중 메시아처럼 행동하며 유대 사회를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메시아가 올 때는 특별한 표적을 보여 준다는 유대인들의 구전에 따라 예수가 진짜 메시아라면 하늘로서 오는 표적을 보여달라고 압박했다. 예수는 “너희가 날씨는 분별하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그동안 수많은 표적을 이미 보여 주었는데 너희가 깨닫지 못하는 것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보여 줄 하늘 표적의 절정은 요나의 표적이다.”라고 했다. 요나의 표적은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의미한다. 표적이란 초자연적인 현상과 기적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계시하는 사건이다. 그 속에 하나님 경륜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담겨 있고, 영적 지혜와 통찰을 통해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이사야 등 선지자들은 하나님 관점의 역사관을 가지고 시대를 분별했으며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했다. 요나의 표적 언급에는 심판 때에 요나의 외침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했던 것처럼 요나보다 큰 인자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라는 메시지와 심판의 경고가 담겨 있다.
3. 진리의 실재가 아닌 종교적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예수는 배 안에서 제자들과 ‘누룩’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제자들은 예수의 표적에 관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야기에 심취하여 정작 먹거리를 준비하지 못한 채 승선했으며, 예수의 누룩에 관한 언급을 빵 문제와 연계하여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영적인 누룩에 관하여 언급했었다. 예수는 빵을 준비하지 못한 일로 고민하는 제자들에게 벳새다의 오병이어 사건과 빵 두 개로 사천 명을 먹인 데가볼리 집회 사건을 상기시켰다. 주님이 내게 베푸신 놀라운 일들을 잘 기억하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예수가 언급한 두 가지 누룩은 진리를 변질시키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정통 보수신앙을 강조하며 율법과 종교적 형식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때로는 성경의 본질적인 진리보다 종교적 의식과 형식적 제도에 더 큰 권위를 부여했다. 사두개인은 인간 영혼의 불멸성과 몸의 부활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헬레니즘 문명 시대에 지성을 중시했고 현실적 실리 추구 가치관으로 삶을 영위했다. 본질에서 벗어나거나 협소한 주제에 고착화된 신앙은 참된 진리에 관한 이해를 막는 벽이 된다. 인간이 보기에 선한 것이 하나님 보기에 선하지 않을 수 있다. 성경에서 추출한 장로들의 유전처럼 애국심, 반공과 통일, 민주화, 인권이 기독교 진리를 대체하거나 그 본질을 왜곡시키는 누룩이 될 수 있다. 기독교 진리의 실재와 동떨어진 인본주의에 근거한 영적인 누룩을 분별하는 통찰과 주의가 필요하다.
4. 개인 신앙에서 내면화된 하나님 나라 크기는 영적 시각의 밝기와 비례한다.
예수 일행이 배에서 내려 벳새다의 한 동네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한 시각장애인을 데리고 와서 고쳐주기를 간청했다. 아직 은둔 여행 중이라 예수는 그를 동네 밖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고 눈에 침을 발라주며 안수했다. 그가 사물을 희미하게만 보자 예수는 다시 한번 그를 안수했고 그러자 그가 사물을 밝히 보게 되었다. 예수가 데가볼리에서 말 더듬는 청각 장애인을 고칠 때는 손가락을 귀에 넣고 혀에도 손을 대면서 “에바다”를 외쳐 치료했다. 반면에 벳새다의 시각장애인을 고칠 때는 침을 바르고 안수를 두 번 해서 치료했다.
배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아직도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의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어 있느냐?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는구나.”라고 했다(막8:17-18). 예수가 말로만 선포하지 않고 이처럼 행동 메시지를 전한 것은 옆에 있는 제자들이 뭔가를 깨닫도록 시청각적 교육 목적이 포함된 듯하다. 제자들이 진리와 영적 실재를 보고 듣고 깨닫는 일에 둔감하여 영적 장애인 같음을 은연중 시사했다. 영적인 성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과 관계가 깊다. 개인 신앙 측면에서도 성도가 보고 듣는 영적 지각의 정도 만큼 진리가 주는 자유와 영적인 풍성함을 누린다.
☞ 나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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