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25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25과
제목: 수전절 즈음 (요10:22-11:57)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초막절 기간 중 예루살렘을 뒤흔들었던 예수는 3개월쯤 후 수전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또 무슨 소동을 일으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느냐는 당국자들의 시비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이 하늘에서 왔다는 초막절 설교에 이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는 요지로 수전절 설교를 했다. 그 무렵 죽은 나사로를 살렸고 이 사건을 계기로 종교지도자들은 은밀하게 예수를 죽이려고 했던 계획을 바꾸어 공식적으로 예수를 죽이기로 결의했다. 예수는 그를 체포하려는 자들을 피해 베레아로 피하여 3개월을 지낸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69-275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수전절(하누카)은 어떤 절기인가?
2. 예수의 수전절 설교 핵심은 무엇인가?
3. 예수를 죽이기로 공식 결정한 회의에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어떤 명분을 내세웠는가? (요11:50) 그의 말이 어떻게 예언이 되었는가?
4. 예수가 베다니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린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5. 죽음으로부터의 부활이 어떻게 영생과 구원을 확증하는가?
☞ 본문 해석 노트
1.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은 한 분이다.
초막절이 지나고 3개월쯤 후 수전절에 예수는 다시 예루살렘 성전 솔로몬 행각에 나타났다. 수전절은 신구약 중간기에 생겨난 유대인 전통 절기이다. 유대를 점령했던 셀레우코스 왕조 에피파네스 4세의 박해가 심해져 예루살렘 성전을 더럽히고 모독하자 마카비 혁명이 일어나 그들을 축출하고 독립했다. 이를 기념하는 절기가 수전절이다. 예수는 공생애 공식 사역을 예루살렘 성전 정결 사건으로 시작했고 마지막 종려주일을 지내고 입성한 예루살렘에서 성전 정결 사건을 다시 보여 주었다. 복음서의 처음과 끝을 장식하는 이 사건과 같은 맥락에서 성전 회복과 정결의 의미가 있는 수전절에 그의 설교 역시 의미가 깊다. 첫 성전 정결 사건 때 자신이 성전의 주인이라는 예수의 말에 세상은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촉각을 세웠다. 초막절 설교에서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이 위에서 보낸 자이고, 길이며 진리요 생명이며, 모세 때부터 오리라 예언된 메시아라고 했다. 수전절 설교에서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하며 그는 자신이 곧 하나님이라고 주장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 됨의 의미는 삼중적이다. 그 첫째는 서로 다른 위격(位格)이면서도 둘로 나눌 수 없는 ‘숫자적인’ 한 분이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본질적인 동등(빌2:6)을 나타내는 ‘존재적인’ 하나의 의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아들’이 함축하는 의미와 같은 맥락이다. 셋째는 목자와 양의 비유처럼 유기체적 친밀함의 완전한 교제를 의미하는 ‘관계적인’ 하나 됨이다. 예수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신자)도 하나가 되어”(요17:21)라고 언급한 ‘하나’의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이 진리의 깨달음이 영생과 구원에 이르게 하고 우리에게 참 자유를 준다(요17:3).
2. 죽음은 생명의 막힘과 단절이다.
예수는 나사로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요11:4). 공생애 동안 계속된 예수 설교의 핵심은 ‘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아)로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라는 것이었다. 막연한 추상 개념으로 느껴지는 ‘영생’을 예수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통해 매우 현실적인 개념으로 분명하게 깨우쳐 준다. 죽음은 인간의 현실이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몸의 부활과 영생도 현실이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죽음의 실재에 관한 개념 이해가 없으면 영생의 개념 또한 이해할 수 없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었다는 표현을 반복한다. 죽은 자는 감각과 활동이 없고 냄새가 나며 다른 사람과 생명적 교제가 없이 묶인 채 무덤에 있다. 영으로 죽은 자는 죄와 양심에 감각이 없고, 하나님 생명의 막힘과 단절로 무능력하며, 사망의 냄새가 난다. 여러 가지 근심 걱정에 묶여 있고, 정욕과 악습에 매장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과 마음을 열고 생명력을 나누지 못한다. 예수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라고 하며(요11:25-26), 무덤에서 나사로를 불러낸 것처럼 사망의 무덤에서 나오라고 인류를 부른다. 이는 예수가 자연인을 죽은 자로 전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하나님 없는 인간의 영적 상태는 영이 죽어 무덤에 묻혀 있는 것과 같다. 육체를 움직이며 생활하고 있는 듯해도 실상은 가정과 일터 등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이 무덤에 불과하다. 근심 걱정, 시기 질투, 허무와 절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한다. 영혼의 출입구를 막고 있는 죄악의 돌이 옮겨져야 한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했던 그 음성이 지금 우리 문밖에 있다. 들어야 할 진리를 듣는 자에게 돌문이 열리는 부활의 복이 있다.
3. 부활은 영생의 확증이요 생명의 부활은 완전한 구원의 문이다.
죽음이 변할 수 없는 사실인 것처럼 부활 역시 분명한 실재이다. 부활은 인간이 영적인 존재임을 확증한다. 하나님의 영을 상실했거나 영적 활동성이 멈춰 있으면 죽은 자이고, 죽은 자가 하나님 생명, 곧 창조주의 ‘절대 생명’을 갖는 것이 영생이다. 그리고 부활의 예표적 전형으로 보여 주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은 영생의 가시화이다. 나사로의 부활은 예수의 부활을 믿게 하는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생명의 부활 진리는 영생과 구원을 확증한다.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를 통해 영생을 맛보며 산다. 복음과 진리가 주는 자유는 영생의 맛보기이며, 영생에 이르는 생명의 부활은 완전한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구원의 문이다.
예수는 우리의 부활과 영생을 위해 십자가에 죽어야만 했다. 예수를 죽이기로 공식 결정한 회의에서 대제사장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유익하다며 예수 죽임의 명분을 세웠다. 그는 예수 한 사람을 희생 제물 삼아 온 유대 민족이 로마의 징벌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는 의미로 말했지만, 요한복음 저자는 한 사람 예수의 죽음으로 온 인류가 살게 된다는 복음의 역설적 유비로 재해석했다(요11:50).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음같이 하나의 죽음이 모두에게 영생의 길이 열린 진리가 깨달아지는 자는 복이 있다.
☞ 나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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