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27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27과
제목: 예루살렘 입성
(요12:1-11, 막11:1-25, 마21:1-22, 눅19:28-48)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는 최후의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베레아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여리고를 거쳐 예루살렘 근교 베다니에서 며칠을 지내는 동안 나사로의 동생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는 사건이 있었다. 종려주일, 베다니에서 나귀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군중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튿날 베다니를 떠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시들게 했고 성전에 들어가 또 한 번 성전 정화 사건을 터트렸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75-287 참조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가 그의 생애 마지막 유월절에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하면서 잠시 머문 곳은 어디인가? 베다니에서 예수와 관련된 어떤 일들이 있었는가?
2. 종려주일에 예수가 나귀를 타고 공공연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한 이유는 무엇인가?
3.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던 예루살렘 입성 당시 군중과 예수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의 심정적 분위기는 어떻게 달랐는가?
4.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도중 예수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여 뿌리째 마르게 한 사건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5. 예수의 두 번째 예루살렘 성전 정화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 본문 해석 노트
1. 전적인 헌신과 순전한 신앙의 장애물은 세속화 신앙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유월절 양이 되어 죽는 그의 최후 사역을 위해 베다니에서 숨 고르기를 하였다. 그때 마리아는 죽었던 오빠 나사로를 살려주고 온 가족에게 하나님 나라를 소개해 준 예수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부었다. 그것은 그녀가 할 수 있는 전적인 헌신의 표였고 행동으로 표현한 신앙고백이었다. 제자들은 값비싼 향유가 아깝다고 생각했고 가룟 유다는 3백 데나리온쯤 되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데 쓰면 유용할 텐데 낭비한다고 그녀를 크게 꾸짖었다. 예수는 그녀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귀한 일을 하였다며 복음을 전할 때마다 그 일도 함께 전파하라고 했다.
때로 순전한 헌신의 신앙을 가로막는 사람은 명분만 내세우는 형식적인 신앙인이다. 주님의 심정을 전혀 헤아리지 않는 세속화 신앙을 가진 자는 참 신앙의 성도를 핍박한다.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웠던 가룟 유다는 그 중심이 불순했다. 그는 발람 선지자처럼 재물에 집착하는 세속화 신앙의 소유자였다. 생명 없는 그의 신앙은 결국 예수를 팔아넘기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배신의 이유가 돈 때문이었든, 열두제자 중 혼자만 남쪽 유다 사람으로 지역 차별의 소외감을 느꼈기 때문이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 어쩔 수 없이 예수가 기적을 행하게 하여 로마의 속박에서 유대 해방의 때를 앞당기려는 정치적 목적이 동기가 되었든, 그것은 주님의 뜻을 무시하는 인본주의적 자기 중심신앙이었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신앙이 아니라 세속적 유익과 자기 목적을 위해 주님을 이용하는 우상숭배 신앙이었다. 이는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죄이며 참 진리의 신앙을 저급한 종교로 전락시키는 부패한 신앙이다.
2. 메시아 예수는 온 세상 평화의 왕이었다.
예수가 떠들썩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열열한 환영 인파는 개선장군의 승전을 만백성에게 알리는 축제를 연상시킨다. 예수는 분명 하나님 나라 왕이었고 메시아였다. 그의 공식적인 예루살렘 입성은 그가 온 세상의 진정한 왕이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시각적 메시지였다. 그러나 군중과 제자들은 동상이몽으로 흥분했다.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한 군중과 예수 제자들은 새로운 유대 혁명 정부에 대한 기대로 흥분했지만, 예수는 곧 도살장으로 끌려갈 어린양으로서 속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그는 개선장군처럼 말을 타지 않고 평화의 왕으로 나귀를 탔다. 이는 일찍이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화평을 전하는 메시아였다(슥9:9-10).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은 다만 겸손함의 상징이 아니라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보여 준 것이었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 그림은 나귀처럼 온 인류의 죄를 등에 짊어진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온 메시아로서 자기를 계시한 것이다. 희생 제물로 드려진 자기의 피 곧 죽음만이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신인神人 관계에서 샬롬을 이루는 길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가 화평케하는 메시아로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 막힌 담을 자신의 육체로 헐고 새 사람을 지었다고 했다(엡2:12-15). 우리는 모두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담당한 주 예수를 향한 감사가 신앙고백이다. 소망 없는 우리가 알지도 못하였고 간구도 하지 않았는데 메시아를 보내 구원의 길을 열어 놓으신 여호와 하나님께 찬송함이 그에게 영광을 올려 드리는 삶이다(사53:6).
3. 쓸모있는 자는 행복한 자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누군가에게 또는 어느 사회에 쓸모 있는 자로 자기를 인식하는 자는 행복한 사람이다.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 쓸모 있는 자로 인식되는 자는 더욱 행복한 사람이다. 쓸모 있는 자녀는 부모에게 영광을 돌리고, 사회 공동체에 이바지하는 사람은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창조 목적대로 구실을 다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예수를 태운 베다니의 나귀는 최고의 존재 목적을 수행했고 그 나귀 주인은 “주님께서 쓰시겠다고 한다.”라는 말을 듣고 기뻐하며 조건 없이 메시아에게 자기 소유를 내어줌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반면에 베다니의 무화과나무는 주께서 필요로 하실 때 열매를 내놓지 못한 쓸모없는 존재였기에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했다. 그 결과 뿌리째 시들어 죽는 신세가 되었다. 나귀와 무화과나무의 대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대조를 유비로 보여 준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이다. 시들은 무화과나무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선택받은 이스라엘이 그 열매를 내놓지 못해 버림받는 처지로 전락하는 상징적 그림이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예수가 성전에 들어가 3년 전 그의 공식적인 등장에서 보여 준 예루살렘 성전정화를 다시 두 번째로 보여 준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BC 600년경,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기 직전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외친 선포를 예수가 인용하고 있다.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성전에서 너희가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면서 샬롬을 말하느냐? 너희 눈에는 이 성전이 도둑의 소굴로 보이느냐?”(렘7:11) 예레미야의 선포 이후, 보여 주는 하나님 나라 모델로 선택된 이스라엘은 멸망하였고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예수가 예레미야 외침을 인용해 같은 메시지를 선포한 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쓰임 받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컬어진 성전은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무용지물이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쓸모있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세상에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보다 더 귀하고 행복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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