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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클팍 박영주 x 앙티수 남성숙 선교사의 피지선교 이야기 The mission stories of Uncle Park and Aunty Su in the South Pacific Islands

연재 [빈들의 양식] #28

  • 2021.12.03 16:02
  • 박영주의 글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28과

제목: 화요일, 긴 하루 (마21:23-25:46)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 화요일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과 더불어 신학 논쟁을 벌였다. 세금, 부활, 계명 등의 의제와 더불어 예수가 과연 메시아인가 하는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 토론은 대중을 상대로 한 예수의 마지막 사역이었다. 이후 제자들만 데리고 감람산에 올랐고 감람산 유언 강론을 남겼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과 종말의 징조, 인자의 재림이 주제였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287-296 참조

 

화요 신학 논쟁

☞ 관찰 및 토의 질문

 

1. 화요 신학 논쟁에서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에게 어떤 질문 공세를 퍼부었는가? 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무엇이었으며, 세례요한에 관한 예수의 반문 의도는 무엇이었는가?

 

2.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농부의 비유, 혼인 잔치의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3. 예수가 시편 110편을 인용하여 말하려고 했던 주안점은 무엇인가? (마22:41-46)

 

4. 마태복음 23장의 심판 메시지는 예수의 어떤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가? 그것은 또 구약 선지자들의 메시지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

 

5. 예수의 감람산 유언 강론 내용은 무엇인가? 또, 예루살렘 성전 파괴 예언은 역사적으로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감람산 강론

☞ 본문 해석 노트

 

1. 다윗의 자손 예수는 다윗이 주님으로 고백한 메시아였다.

 

화요 신학 논쟁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를 시험했지만 실패했다. 그들은 예수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예수의 모습이 메시아에 관한 그들의 전이해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다윗의 씨에서 나온다고 믿었고, 위대한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해방하는 유대 민족의 구원자로만 메시아를 생각했다. 예수는 성경 예언대로 세례요한이 와서 자기에 대하여 증언했는데도 그들이 믿지 않음을 안타까워했고 세례요한의 증언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메시아 됨을 알 수 없다고 했다. 예수는 또 그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자 시편 110편을 인용했다. “여호와께서 내 주님께 말씀하시기를…”라는 다윗의 고백에서 주님은 메시아임을 너희가 아는데 어찌 다윗이 자기 후손에게 주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했겠느냐고 물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 메시아는 다윗이 주님으로 불러야 할 거룩한 존재이며,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임을 확증했다. 유대인들이 교만한 자기 고정관념에 갇혀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한 것처럼, 오늘날도 우주 만물과 성경이 이중으로 창조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데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롬1:20). 그리스도 영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알아보게 한다. 그 영의 놀라운 역사를 찬미하는 것이 신앙이다. 구원은 이 복음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복이다.

예수는 혼인 잔치의 비유에서 하늘나라 풍성한 잔치 같은 삶에 초대받은 사람은 많지만 택함을 입고 예복이 준비된 자는 적다고 했다. 하나님은 벌거벗은 아담 부부에게 희생 제물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신 것처럼,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가죽옷 예복을 준비해 주셨다. 성도는 이 복음의 예복을 입고 천국의 풍성함을 누릴 것이다.

 

2. 선택받은 이스라엘은 사명을 감당치 못해 나라를 잃었다.

 

예수와 제자들은 감람산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노을이 지는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예수의 입에서는 예레미야의 슬픈 노래가 흘러나왔다. 머지않아 멸망할 예루살렘을 생각하며 예수는 예레미야의 심정으로 울고 있었다. 화요 신학 논쟁에서 예수는 두 아들 비유와 포도원 농부의 비유를 들어 교만한 이스라엘은 메시아를 건축자의 버린 돌같이 버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죄인들과 이방인들이 들어간다고 했다. 예수는 이스라엘이 황폐케 되는 것은 한두 번의 잘못 때문이 아니며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품듯 하나님이 그들을 품으려 한 것이 몇 번이었냐고 반문했다. 이스라엘은 셋 계열이요 제사장 나라요 열방의 모델 나라로서의 사명을 저버렸다.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자기 길로 갔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 유형 국가로서의 이스라엘은 저주받아 말라버린 베다니의 무화과나무처럼 버려졌다.

예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은 AD70년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었다.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은 곧 이 세상 종말이라고 알고 있던 제자들은 세상 끝날의 징조에 관하여 예수에게 질문했고 예수가 감람산 유언 강론을 베풀었다. 적그리스도들의 미혹과 곳곳에 전쟁의 소문, 기근과 지진 등 자연재해와 해가 어두워지고 모든 족속이 통곡할 때 인자가 다시 온다고 했다. 우리는 천사들의 큰 나팔소리가 들릴 때 인자가 구름을 타고 신기한 능력으로 오는 영광스러운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예수는 그날의 때에 관해서는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모르니 깨어 있어야 한다며 열 처녀 비유를 베풀었다. 구원과 헌신은 뒤로 미루면 기회를 놓치고 비극에 빠지기 쉽다. 타인에게 기름을 빌리지 못한 여인들처럼 신앙은 타인만을 의지하며 수동적이어서는 안된다. 전적으로 나 개인이 책임지고 준비해야 한다. 기름 없는 등잔만 들고 있다면 등불은 켜지지 않는다. 믿음의 모양만 가진 신앙은 주님의 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 후회의 그 날이 오기 전, 너무 늦기 전에 깨어 일어나 성령의 기름을 준비하는 자가 지혜로운 인생을 설계하는 자다.

 

3. 구세주 어린양 예수는 세상 끝날에 심판주 어린양으로 오신다.

 

세례요한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 양’의 아이콘으로 표현했다. 본질상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셨던 예수의 삶은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 제물처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어 골고다 십자가를 향해 걸어간 생애였다. 모리아산의 제물로 드려지는 이삭처럼 반항하지 않았고 가시관을 쓰고 채찍에 맞아도 순종함으로 받아들였다. 손발에 못이 박히고 창에 찔려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고 십자가에 죽어야 할 사명을 가진 어린 양이었기 때문이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어린양을 보았다. 사도 요한에게도 심판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이콘은 ‘어린양’이었다. 세상 끝날에 이 땅에 오는 어린양은 힘없는 속죄양이 아닌 절대적인 힘을 가진 권능의 심판주다. 화요 신학 논쟁 끝 무렵에 하나님과 그의 나라 복음을 거부한 자들, 위선자들과 눈먼 지도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맹수처럼 포효하며 심판을 선포하는 장면(마23장)은 엄위하신 심판주의 모습이었다. 제자들에게까지 생소했던 그때 그의 모습은 재림할 심판주 예수의 예고편 같은 모습이었다. 나약해 보이는 초림 예수, 끝없이 사랑하고 용서해주시는 주님만 생각하고 심판주 예수를 보지 못한다면 그의 반쪽 모습만 보는 것이다.

예수가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언급했듯이 최후의 심판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날에 복 받고 영생에 들어가는 자는 적은 일에 충성한 작은 자들이라고 했다. ‘적은 일’과 ‘작은 자’는 반어법적인 표현이다. 세상 사람들은 삶에서 신앙생활은 ‘적은 일’로 간주한다. 세상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멸시해도 되는 힘없는 ‘작은 자’로 여긴다. 그러나 그 결국을 안다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할 것이다. 신앙의 일은 적은 일이 아니라 엄청난 일이며 그리스도인은 작은 자가 아니라 위대한 자로 하나님이 여기신다.

주님이 공중에 재림하실 때 사람들은 크고 놀라운 음성을 듣게 될 것이며 무서워 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일어나고 지상에 살아남은 자들은 홀연히 썩지 아니할 몸으로 변화하여 공중에 들림을 받을 것이다. 주 예수를 믿고 영접하면 누구든지 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 할렐루야.

예루살렘 멸망 예언

☞ 나의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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