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빈들의 양식] #30
박영주의 사복음서 스토리
「벤 아담」책과 짝을 이루는
큰 그림 성경 해석과 인사이트(insight)
제30과
제목: 겟세마네 동산
(요15:1-18:12, 마26:36-56, 막14:32-52, 눅22:39-53)
내가 붙이는 제목 :
☞ 본문 요약
예수는 제자들과 최후의 저녁 식사를 한 뒤 습관을 따라 기도하러 감람산으로 갔다. 도중에 포도밭을 지나간 듯하며, 예수는 제자들이 다락방 강론 내용의 이해가 미진하다고 여겼는지 포도나무를 비유하여 강론을 이어갔다. 그리고 제자들을 위한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를 해주었고 감람산 겟세마네에서는 흩어져 각자 기도의 시간을 가졌다. 그 밤에 대제사장들과 사병들이 그곳에 들이닥쳐 예수를 체포했고 제자들은 도망쳤다.
☞ 상황과 배경 「벤 아담」 304-308

☞ 관찰 및 토의 질문
1.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에서 했던 다락방 강론과 감람산으로 가는 길에 했던 포도나무 강론의 내용은 어떻게 연결되는가?
2. 예수의 포도나무 강론 핵심 키워드는 무엇이었는가?
3. 이 주제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는 말 속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4. 예수가 유언 강론 마무리로 대제사장적 기도를 할 때의 심정과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 겟세마네에서 예수가 피땀 흘려 기도한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
6. 겟세마네에서 대제사장들의 사병들에게 예수가 붙잡힐 때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 본문 해석 노트
1. 기독교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연합이다.
‘떠남’으로 시작했던 다락방 강론에서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빌립의 말에 예수는 아버지가 내 안에 있으니 나를 보는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했다. 성부가 성자 안에 내재하는 ‘연합’을 말했으나 제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이어지는 포도나무 강론의 핵심 주제는 ‘연합’이었다. 초월자 엘로힘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임재하며 인간 현상 세계 안으로 들어와 내재(샤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자기를 계시했다. 엘로힘과 여호와는 같은 분이면서 다른 성격을 가지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각각 자기를 잃지 않으면서도 하나인 신비한 연합이다. 영지주의 이단은 이 ‘연합’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그리스도와 예수를 분리했다. 예수가 세례받을 때 임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렸을 때 예수를 떠났다고 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100% 하나님이며 100% 인간이다. 그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한 연합은 이성적으로 알 수 없다.

예수는 포도나무 강론에서 하나님 나라 관계 원리인 ‘연합(unity)’을 포도나무 비유를 들어 가시적 그림으로 보여 주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듯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영생을 얻는다. 성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연합은 불교나 힌두교가 말하는 범신론적 ‘합일’과는 다르다. 범신론은 신 또는 우주와 합일하여 인간이 신이 된다는 원리다. 그러나 기독교의 연합은 삼위일체에서 보여 주듯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하나가 되는 연합이다. 성도가 예수를 영접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공동체적 의미를 내포하는 연합이다. 아담이 하와에게 너는 나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 곧 ‘너는 나다’라고 했을 때의 유기적인 부부 관계 연합도 같은 맥락이다. ‘혼자’와 ‘함께’의 공존은 가정과 사회공동체의 창조 원리이며 구원의 신비이다. 신앙생활에서 열매 맺고 승리하는 삶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듯 주님 안에 ‘거함의 원리’를 깨닫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그리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4-5)
2. 예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는 지금도 살아 있다.

대제사정적 기도(요17장)는 예수가 공생애 사역을 마무리하는 기도였다. 그 기도의 핵심은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하소서!”이다. 그것은 예수가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두고 떠나는 인간적 이별의 안타까움이 담긴 기도였고, 헤어짐을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라며 더욱 제자 공동체의 연합을 당부하는 기도였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하며 격려했다(요16:33).
예수의 대제사장적 중보기도는 그의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를 위한 중보로 이어졌다. “나는 이 사람들(제자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합니다.”라고 기도했다(요17:20). 예수의 중보기도는 성령에 의하여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성령이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 성령의 중보기도로 말미암아 성도의 삶은 결국 모든 것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는 최후 승리와 구원이 보장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3.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예수는 감람산 겟세마네에서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며 기도했다(눅22:44). “아버지여,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 기도는 예수가 여러 번 공언한 자기 죽음을 막상 일이 닥치니까 마음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다. 고통을 피하고 싶은 인간적인 원함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고통스러운 의지적 순종을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인성을 가진 예수가 성부에게 자신을 맡기며 극한 상황 속에서 최고의 질적 순종을 나타낸 핏방울 기도였다. 빛이 어두움을 담아내는 신적 고통의 계시였다.
인성을 가진 예수가 십자가 고통의 짐을 안고 씨름한 겟세마네 기도는 죄인 된 우리의 기도와는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자기를 부인하고 눈앞에 보이는 고난과 불행을 감수하며 주님의 뜻에 자기 뜻을 일치시키려는 기도의 본질은 같다. 기도의 본을 보여 주신 주님의 기도를 본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성령으로 기도할 때 주님께 전적 위탁의 믿음과 자기 부인이 가능하고 하나님의 뜻과 영광이 드러난다.
4. 그리스도인들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야 한다.
예수는 세 제자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며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너희는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라고 했다(마26:38, 40). 그는 기도를 영혼이 깨어 있는 상태로 표현했다. 깨어 있음은 ‘주님과 함께’ 의식이다. 영이 잠들면 마귀의 시험이 틈탄다. 그래서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했다(살전5:17). 이는 기도의 양적 의미보다는 질적인 의미로써 영적으로 깨어 있음과 상통하는 기도의 의미이다. 동시에 양적인 의미도 담겨 있다. 예수는 동일한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했다(마26:44). 그것은 응답을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매달리는 기도의 본이기도 했다. 기도는 내 안에 있는 세상과의 영적 싸움이기도 하다. 영적 싸움을 모르는 신자는 어린아이 신앙으로 시험을 이길 수 없고 영적 승리의 맛을 알 수 없다.
☞ 나의 노트
'박영주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재 [빈들의 양식] #31 (0) | 2021.12.03 |
---|---|
연재 [빈들의 양식] #29 (0) |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8 (0) |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7 (0) | 2021.12.01 |
연재 [빈들의 양식] #26 (0) | 2021.12.01 |
댓글
이 글 공유하기
다른 글
-
연재 [빈들의 양식] #31
연재 [빈들의 양식] #31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9
연재 [빈들의 양식] #29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8
연재 [빈들의 양식] #28
2021.12.03 -
연재 [빈들의 양식] #27
연재 [빈들의 양식] #27
2021.12.01
댓글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